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by Clare Bishop)
2011.05 현시원 발제
■ 는 클레어 비숍이 글에서 제시한 소제목으로 이 발제는 발췌한 몇 소제목에 따라 논의할만한 내용과 질문들을 간략하게 전달한다.
■ 팔레 드 도쿄!
: 글은 '팔레 드 도쿄'로 시작한다. 2002년 파리에 문을 연 '팔레 드 도쿄'는 미술품을 소장하는 전통적인 미술관/갤러리와 다른 방식으로 현대미술을 다루는 공간이다. 이곳이 필자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2000년대 유럽 미술계의 뚜렷한 경향이 되는 '실험실 공간'의 상징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공동으로 이뤄지는데 대표는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제롬 상과 보드로 현대미술관의 전 큐레이터이자 예술 간행물의 에디터 니콜라 부리오다.
관료적인 수집에 묶인 미술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기 위해 ;실험실' '공장' 등의 은유를 사용한 이 '공동' 디렉터 체제의 큐레이팅은 열린 결말, 상호작용, 종결의 저항이라는 특성을 가진 작품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이는 예술작품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것이며 뒤에 논의되는 옴베르트 에코, 롤랑 바르트 등의 사상과 연관된다.
: 클레어 비숍은 선언적으로 서두에서 이러한 '실험실'적 경향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날을 세운다. 첫째, 아이덴티티를 고의적으로 흐린 작품의 성격을 분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 열린 결말은 소위 은유일 뿐 관람객들에게 또는 미술 관계자들에게 전혀 무엇을 재고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소위 실험실이 여가 혹은 오락 공간으로 마케팅 되기 쉽다는 점이다. 이 말은 국내 예술창작센터 등 많은 창작센터 자체가 '소풍오세요' 등의 은유를 사용하는 것을 떠올려봐도 쉽다.
: 작품뿐 아니라 미술관 내 시설을 동시대 작가들에게 개조, 디자인을 밭긴 뒤 그 공간을 예술작품으로 선보이는 사례도 많다. 이것에 관해 필자는 할 포스터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 시설은 다른 방식으로 빛날 수 있는 작품들을 가려버린다. 그 곳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며, 문화 자본을 모으고 디렉터-큐레이터가 스타가 된다"
1. 할 포스터가 말한 스펙터클은 비단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빛날 수 있는 작품들을 특정 창작 스튜디오, 또는 봄 페스티발 등의 행사로 묶어내는 데 있어서 큐레이터나 디렉터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과연 예민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의 여지가 많다. 국내의 흐름들은 위 실험실적 경향과 어떻게 비교해 생각해볼 수 있을까.
2. 프로젝트 기반의 '실험실' 경향은 새로운 프로덕트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이 프로젝트들은 '실험실'의 명성을 위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위한 것인가? 작품 활동이라는 액티베이션과 새로운 실험실의 전략들은 구분될 수 없는 것일까?
■ 관계미학 + 미적 판단
-클레어 비숍이 관계미학에 대해 의심하는 부분은 부리오가 90년대 예술이 60년대의 그것보다 정치화가 덜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부리오가 주장하는 '관계적 예술'에서 관람자가 집단적인 사회적 존재, 나아가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만드는 수단(혹은 주체)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한다. 환경을 전면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부리오가 가지고 있는 마이크로토피아적 신념을 보여주는 부리오 자신의 문장은 "더 행복한 내일에 걸기보다 현재의 이웃들과 가능한 관계들을 고안해 내는 것이 더 긴급해 보인다"
-부리오가 책에서 언급한 몇 작가들은 계속 반복되는 바, 이들 관계예술의 특징은 첫째 공간을 응시하기 만들기보다 공간을 유용하게 만들었으며/ 둘째 영국 작가 등의 브랜드 화된 개성과는 다르게 피처링, 리믹스, 디제잉, 프로그래머로 진입 등 '협업'하는 작업으로 누가 누구의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셋째 큐레이팅 행위 자체에도 서로가 서로를 큐레이팅하기도 했다.
-클레어 비숍은 본 글에서 부리오가 대표적으로 언급한 리크릿 티라바니자(자기성찰 없이 유비쿼터스 적 재현을 보여주고 있는 형국)와 리암 길릭(디자인과 미술의 경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동하는지 애매모호. 작품이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뻐하기는 하는 건지 등)을 언급하며 이 둘이 독립적 시각성을 넘어, 상호주관적인 관계에 우선권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나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왜 '상호주관성'이 의미가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1960년대 옴베르트 에코가 '열린 작품'의 미학 즉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는데(수용의 문제), 클레어 비숍이 보기에 '열린 작품/ 움직이는 작품'의 시학은 모든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특성인 것에 반해 부리오는 이를 일부 작품에 특정적으로 한정하는 우를 범했다. 마치 이것이 작가가 독특하게 갖고 있는 예술적 의지의 문제인 양!
1. 부리오는 열린 결말의 참여 형 작품들을 평가하는 척도가 미학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작품 구조와 대화의 질은 절실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부리오에 따르면 우리는 관계예술 작품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막상 티라바니자가 만든 음식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왜 요리된 것인가? 정말 전시장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기나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알 수 있는 구조가 취약하다.
클레어 비숍이 질문한 것을 다시 가져온다면, "어떤 종류의 관계가 누구를 위해 그리고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
■ 적대+
: 클레어 비숍은 이제 본격적으로 명확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작가들의 작업을 보여주기 이전에 '적대'에 관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상탈 무페의 '적대' 관념을 꺼내온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제대로 된' 민주사회는 모든 적대가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한계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그것이 논쟁으로 이어지는 사회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적대는 불완전한 존대들끼리 일어나는 여러 개의 과정이며, 이 관계는 단일한 전체성이 아니라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불확실하고 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비숍은 '적대' 개념을 통해 관계미학이 만들어낸 관계들이 부리오의 주장과는 반대로, "본질적으로 민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부리오가 말한 작가들이 일궈낸 관계는 완전한 주체성과 연대가 있는 공동체 내에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쉽게 말해 303 갤러리에서 있었던 트리바니자의 작품 안에서 대화한 사람들은 미술 잡지 편집장이거나 갤러리 대표, 이들은 서로 홍보하거나 의견을 맛보기만 한다. 어떤 이들은 크리바니자 작업에서 '피난처' 운운하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한 피난처란 말인가? 관계미학의 작업들은 아주 느슨하게 말할 때에만 정치적일 수 있다. 대화의 내용은 그 자체로 민주적일 수 없다! 열린 결말과 관객의 해방(어떤 자유)에도 불구하고 사교모임으로 전락한다.
1. 콜렉티브의 활동들. 어떤 사교모임?
2. 어떤 대화가 그렇다면 정치적일 수 있을까.
■ 비동일시와 자율성 +관계 적대주의
: 산티아고 시에라의 작품은 관계를 내세우지만 티라바니자와 다르게, 그가 작업하는 공간의 경제적, 사회적 리얼리티의 지표 화된 결과를 도출한다.
: 미술계에서 배척당하는, 때로 사회 현실에서 배척당하는 집단들을 노동력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미술계, 작업으로 불러들인다. 누군가가 사회적이며 법적인 배척으로 인해, 분리된 상태에서만 소통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예술 관람객들에게 어떤 집단 또는 대상과 동일시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 허쉬호른도 '열린 결말'이라는 개념을 관객들이 작품을 오나성한다-식으로 풀지 않고, 자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에 근간을 두고 있다. <바타이유 기념비> 등의 작업.
허쉬호른이 말하길
"나는 상호적으로 작동하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다. interactive. 나는 작동하는 active 작업을 하고 싶다. 내게 예술작품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활동은 사유하는 활동이다. 앤디워홀의 <큰 전기의자>는 미술관 벽에 걸린 그림이지만 나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작동하는 작품은 먼저 나 자신이 최선을 다하도록 요구한다."
관계적 적대
: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공동체에 대해 이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논쟁적인 동기의 제공. 이것이 오늘날 필요한 관계를 다루는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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